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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Statement
앤디 워홀은 전통적인 미술의 개념과 일상생활을 통합하는 대중미술의 파생물인 팝 아트(Pop art)를 대표하는 거장이자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가이다. 그는 미술뿐만 아니라 사진작가, 영화 제작자, 음반 제작자 등으로 미국 대중문화의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 아티스트이다.
그는 미국 펜실베니아 피츠버그 출생으로, 카네기 멜런 대학에서 미술 학사학위를 받은 후 상업미술가로 경력을 시작하였다. 1950년대에 워홀은 신발 광고와 같은 상업 삽화로 이름을 날렸으며, 책의 삽화를 그리거나 무대 디자인을 하기도 했다. 1960년부터 그는 ‘뽀빠이’와 ‘슈퍼맨’ 같은 연재만화를 이용해 실험적인 회화 작품을 제작하였다. 워홀은 첫 개인전에서 캠벨 수프 깡통을 그린 37점의 회화를 시작으로 현재의 앤디 워홀을 대표하는 대량생산되는 기성품과 유명인 도상 작업을 선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들은 당시 뉴욕의 화상들로부터 외면당하였다.
이후 워홀은 1962년 뉴욕의 시드니 재니스 갤러리에서 열린 <새로운 사실주의자들(New Realists)>전에 참여해 주목을 받았다.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상업적인 소재들을 실크스크린 판화기법으로 제작하였는데, 이 작품들은 워홀의 스튜디오인 ‘더 팩토리(The Factory)’에서 그의 조수들에 의해 대량생산된 것이 특징이다. 이 팩토리에서는 롤링 스톤즈, 벨벳 언더그라운드 등 당대 대표되는 아티스트가 모이는 장소가 되었고, 1965년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데뷔 앨범을 프로듀싱과 실크 스크린 프로세스에 의한 앨범 자켓 디자인을 하며 그 유명한 <바나나(Banana,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Album Cover)> 앨범 커버가 탄생하였다. 1970년대부터는 사교계나 정치계의 인물들을 실크 스크린 프린트로 다수 제작하였다.
팝아트는 상업주의와 소비주의에 깊이 물들은 사회에 관해 이야기한다. 앤디 워홀의 작품은 미술의 전통적인 개념과 일상생활을 통합하는 대중미술의 파생물인 팝 아트의 전제를 입증한다. 그가 즐겨 사용한 실크스크린 기법은 기계와 조수의 힘을 빌려 의식적으로 완성작에서 미술가의 흔적을 지웠다. 이와 같이 원작자의 배제를 통한 작품의 대량생산과 대담하고 선명한 색채가 팝 아트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스스로 기계이기를 원했던 워홀은 기계와 같은 미술을 만들어냈고, 기계를 통해 무한히 복제되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작품 또한 명성과 함께 증식을 거듭하고 있다.
참고문헌 : [네이버 지식백과] 앤디 워홀 [ANDY WARHOL] (501 위대한 화가, 2009. 8. 20., 스티븐 파딩, 위키미디어 커먼즈), [네이버 지식백과] 앤디 워홀 [Andy Warhol] (두산백과) -
Professional Experiences
1987
'Andy Warhol: Il Cenacolo', Milan: Refettorio delle Stelline
'Warhol: Shadows', Houston: The Menil Collection, Richmond Hall
'Andy Warhol: "Ich erkannte dafs alles, was ich tue, mit dem Ton zusammenhangt"', Hamburg: Kunstverein in Hamburg
'Remembering Andy: Warhol's Recent Works', Tokyo: Watari Gallery
'Lenin by Warhol', Munich: Galerie Bernd Kluser
'Andy Warhol: Recent Work', New York: Leo Castelli Gallery
'Andy Warhol: A Memorial', Bridgehampton: Dia Art Foundation
'Andy Warhol: Skulls 1976', New York: Dia Art Foundation
'Andy Warhol: Arbeiten/Works 1962-1986', Salzburg: Galerie Thaddaeus Ropac
1986
'Andy Warhol: Disaster Paintings 1963', New York: Dia Art Foundation
'Andy Warhol: Major Prints', Paris: Galerie Daniel Templon
'Andy Warhol: Self-Portraits', London: Anthony d'Offay Gallery
'Andy Warhol: Photographs', New York: Robert Miller Gallery
'Hand-Painted Images: Andy Warhol 1960-1962', New York: Dia Art Foundation
'Andy Warhol: Oxidations Paintings', New York: Larry Gagosian Gallery
1985
'Andy Warhol: Reigning Queens 1985', New York: Leo Castelli Gallery
'Ads', New York: Amelie A. Wallace Gallery, State University of NY at Old Westbury
'Warhol, Basquiat Paintings', New York: Tony Shafrazi Gallery
'The Silkscreens of Andy Warhol: 1962-1985', New York: Lehman College Art Gallery
'Andy Warhol: Paintings 1962-1985 & Early Prints', Cologne: Paul Maenz Gallery
'Vesuvius by Warhol', Naples: Museo di Capodimonte
1984
'Jean-Michel Basquiat, Francesco Clemente, Andy Warhol', Zurich: Galerie Bruno Bischofberger
'Portraits of Ingrid Bergman by Andy Warhol', Malmo: Galerie Borjeson
'Andy Warhol: Renaissance Paintings', London: Waddington Graphics
'Andy Warhol: Details of Renaissance Paintings', New York: Schellman & Kluser Gallery
1983
'Warhol's Animals: Species at Risk', New York: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Andy Warhol in the 1980's', Ridgefield, CT: Aldrich Museum of Contemporary Art
'Andy Warhol's Electric Chairs', San Francisco: Fraenkel Gallery
'Andy Warhol: Paintings for Children', Zurich: Galerie Bruno Bischofberger
* 생전 5년간의 전시내역 (1980 ~ 1987년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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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ucation
1949 Carnegie Institute of Techn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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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ward
35th Annual Art Award for Distinctive Merit for a shoe advertisement
36th Annual Art Directors Club Medal and Award of Distinctive Merit
큐레이터 노트
앤디 워홀의 작품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가장 ‘미국적’인 예술로 정리할 수 있다. 미국은 치밀한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성장한 국가이다. 자본주의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고속 성장했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요소를 돈으로 환산하는 세속적인 요소가 공존하는 국가이다. 워홀은 미국의 이런 양면적인 요소를 작품에 잘 반영한 아티스트이다.
“내가 미국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은 것을 소비한다는 점이다. 대통령이나 우리나 똑같은 코카콜라를 마신다. 돈을 더 준다고 더 나은 코카콜라를 마실 수 없다.”
이와 같이 워홀은 모두에게 공평한 대중문화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생각했다. 대중문화 이미지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에 코카콜라, 캠벨 수프 깡통, 마릴린 먼로와 같은 대상들을 예술의 주요 소재로 삼았다.
하지만 동시에 대중문화의 공허함과 덧없음 또한 워홀의 재료가 되었다. 워홀이 주 소재로 삼았던 당대의 섹시 스타 마릴린 먼로는 화려한 삶을 살았지만 실제로는 불행과 고독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마릴린이 사망하고 나서도 워홀이 만든 마릴린의 형상은 지금도 팝아트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다. 이처럼 풍요롭지만 공허한 이미지는 워홀이 사용하는 주 재료가 되었고, 이후에는 해골 이미지를 이용하여 더욱 노골적으로 이러한 양면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앤디 워홀은 자신을 ‘최초의 상업 예술가’로 칭했으며, 실제로도 자본주의의 수혜를 입은 대표적인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워홀은 58세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화려한 작품들은 여전히 현대인들에게 널리 사랑받으며 미술 시장에서 높은 가격대를 기록하고 있다.
다른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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